◇가문의유래 =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는 한 란(韓 蘭)인데 기자(箕子)의 후예로 상당(上黨) 한씨(韓氏)를 습성 하였다는 우량(友諒)의 32세손으로 전한다. 「청주한씨족보 (淸州韓氏族譜)」에 의하면 란(蘭)은 서기 928년(태조11)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 견 훤(甄 萱)을 정벌(征伐)할 때 장검을 들고 함께 출정하여 삼한(三韓) 통합(統合)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으며 청주 방정리(淸州 方井里)에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특히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전반기에서 크게 세력(勢力)을 떨쳤으며 왕실(王室)을 배경으로 한 권력(權力)의 중축(中軸)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政治的) 사건(事件)은 한씨(韓씨)의 입김이 닿지 않는 예가 드물었다. 이러한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한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난(蘭)의 7세손 강(康)이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충렬왕(忠烈王) 때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와 「고금록(古今錄)」을 저술했으며 첨의 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밀직사(密直司) 영(英)의 아들 종유(宗愈)는 충혜왕(忠惠王)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졌고 충목왕(忠穆王) 때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이어 1349년(충정왕1)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치사(致仕)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 서연관(書筵官)이 되어 왕의 지극한 대우를 받았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명사(名士)들과 함께 술에 취하면「양화사(楊花辭)」를 읊었으므로 양화도(楊花徒)라 불리웠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의 아들 악(渥)은 우정승(右政丞)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대순(大淳), 정당문학(政堂文學) 중례(仲禮), 첨의평리(僉議評理) 방신(方信) 등 일곱 아들과 함께 당대에 뛰어났다. 한편 충목왕(忠穆王) 때 15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수(脩)는 밀직사사(密直司事) 공의(公義)의 아들로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ㆍ동지밀직(同知密直)을 거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어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글씨에 뛰어났고 깊은 학식과 행의(行誼)로 유명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수(脩)의 아들 상환(尙桓)ㆍ상질(尙質)ㆍ상경(尙敬)ㆍ상덕(尙德) 형제가 모두 뛰어나 명문의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더욱 빛냈다. 그 중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를 지낸 차남 상질(尙質)은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주문사(奏聞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결정받고 돌아온 인물(人物)이며, 셋째 상경(尙敬)은 우왕(禑王) 때 문과(文科)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이성계(李成桂)의 개국(開國)을 도와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에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고 정종(定宗) 때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태종(太宗) 때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져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명문세족(名門世族)의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회(明澮)는 영의정(領議政) 상질(尙質)의 손자(孫子)이자 감찰(監察) 기(起)의 아들이다. 그는 말직인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心腹)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에 올랐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하고 같은 해 가을 좌익일등공신(左翼一等功臣)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2년 뒤인 1457년(세조3)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신숙주(申叔舟)등과 함께「신제대전(新制大典)」의 초안을 완성했다.
그의 슬하에 아들 보(堡 : 성종때 좌리공신에 책록)와 딸 넷이 있었는데 맏딸은 세종(世宗)의 부마인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맏아들에게 출가했으며 셋째 딸은 예종(睿宗)의 비(妃), 넷째 딸은 성종(成宗)의 비(妃)가 되었다.? 한편 학문과 인품으로 세조(世祖)의 아낌을 받아 덕종(德宗)의 스승이 되었던 계희(繼禧)는 관찰사(觀察使) 혜(惠)의 아들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남 이(南 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功)으로 익대삼등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졌으며 아우 계순(繼純)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좌의정(左議政) 확(確)의 딸은 덕종(德宗)의 비(妃)가 되었으며 아들 치인(致仁 : 판돈령부사에 오름)ㆍ치의(致義 : 병조판서를 지냄)ㆍ치례(致禮 : 좌참찬을 지내고 서부원군에 진봉) 3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광해군(光海君) 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효순(孝純)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副使)를 지낸 여해(如海)는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응인(應寅)과 함께 가문을 한층 더 중흥시킨 인물들이며 동방(東邦) 제일의 명필(名筆)로 일컬어진 호(號)는 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 교(嶠)와 더불어 학명(學名)을 날렸다.
석봉(石峯) 호(濩)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중국(中國)의 서체(書體)와 서풍(書風)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류(石峯流)의 호쾌(豪快)ㆍ강건(剛健)한 서풍을 창시했으며,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조선(朝鮮) 서예계(書藝界)의 쌍벽을 이루어 동양의 명필(名筆)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효종(孝宗) 때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흥일(興一)과 숙종(肅宗)때 대사헌(大司憲) 세량(世良), 순조(純祖)때 영의정(領議政) 용구(用龜), 고종(高宗) 때 우의정(右議政) 계원(啓源) 등이 명망높은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더욱 빛냈다.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봉수(鳳洙)와 상렬(相烈)은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바친 대홍(大弘)ㆍ상호(相浩), 우종(禹宗)ㆍ필호(弼昊)ㆍ훈(焄)ㆍ흥(興)ㆍ흥근(興根) 등과 함께 충렬로서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으며,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던 만해(萬海) 용운(龍雲)은 3ㆍ1운동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출처: 한국족보편찬회 대표 김명선 / 중국동포 - 족보, 조상땅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