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유래 =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 김주원(金周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으로 서기 777년(신라 혜공왕 13) 이찬(伊飡 : 신라 17등 관계중 두번째 관위)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785년(선덕왕6)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그의 후사(後嗣)가 없어 군신(群臣)들의 회의(會議)끝에 왕(王)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그때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 현재 경주부근의 하천)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 입궐(入闕)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며 즉위를 포기하였다 한다. 이에 내물왕(奈勿王)의 11세손 경신(敬信 : 원성왕)이 왕으로 추대 되었고 비가 그친 후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즉위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원성왕(元聖王)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洲郡王)으로 봉(封)하고 명주(溟洲)· 익령(翼嶺 : 지금의 양양)· 근을어(斤乙於 : 지금의 평해) 다섯 군(郡)을 다스리게 하여 그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하게 되었으며,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주원(周元)의 9세손 상기(上琦)가 고려 예종(睿宗 : 제 16대 왕, 재위기간 : 1105∼1122) 때 평장사(平章事 :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하평장사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인종(仁宗)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 조(朝鮮 朝)에 와서 명문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 대표적이다.
그가 5세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대사성 김 반(金 泮)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 상(尹 祥)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3)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世祖)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思想)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문학(文學)에서 찾으며 외롭게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북(北)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東)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南)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탕유관동록」·「탕유호남록」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9)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 태종의 2남, 세종의 형)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경주(慶州)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 후 누차에 걸쳐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金鰲神話)」와 1468년(세조 13)「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그 외 감찰(監察) 종윤(宗胤)의 아들 충렬(忠烈)이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판관· 경기도사를 거쳐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평(國坪)의 아들 행(行)은 선조(宣祖)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판서 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시혁(始奕)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시현(始炫)의 아들 상중(尙重)은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상집(尙集)과 학자(學者)로 유명한 홍운(鴻運) 형조판서(刑曹判書) 화진(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상철(尙喆)은 1775년(영조51)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찌기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篇集廳)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 주요 집성촌
경기도 양주시 수동면 수산리,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어비리,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리, 강원도 삼척시 북평읍 일원,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일원,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대전리,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청라리,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일원,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일원,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원룡리,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면 일원, 평안북도 철산군 점면 신곡리.
출처: 한국족보편찬회 <중국동포 조상땅 찾기 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