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는 황해도(黃海道) 신천(信川)에 속한 지명으로 본래 단군시대(檀君時代)의 당장경(唐藏京 : 단군의 네 아들이 황해도 구월산밑에 도읍을 정했던 곳)이었다. 그 후 고구려(高句麗)때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초에 유주(儒州)로 개칭하였고 성종(成宗 : 제6대왕, 재위기간 : 981~997)이 시령(始寧)이라는 별호(別號)를 내렸다. 1018년(현종9) 풍주(豊州)에 예속 시켰다가 고려 고종(高宗) 때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하여 조선시대 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895년(고종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나 후에 신천군(信川郡)에 편입 문화면이 되었다.
◇ 가문의 유래
류씨(柳氏)는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후예(後裔)로 전하며, 후손 신갑(辛甲)이 기자조선(箕子朝鮮) 때 요수(遼水)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평양(平壤)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서 은거(隱居)하면서 <일토(一土)> 를 따서 왕씨(王氏)로 변성하여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고치고 단군왕조(檀君王 朝)에서 치민장(治民長)이 되어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의 25세손 수긍(受兢)은 기자조선 말엽에 사사(士師)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의관법도(儀官法道)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평양을 버리고 남천하여 마한(馬韓)에 은둔하였다.
당시 <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이라는 동요가 나라안에 떠돌자 이를 두려워한 기준이 일토산 아래에 살던 왕씨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긍(受兢)의 34세손 왕몽(王蒙)이 아들 8형제 중 일곱째 아들 임(琳)을 데리고 지리산(智異山)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성(姓)을 세 번 변성하여야 후손들이 크게 번성한다고 계시(啓示)하자 왕(王)자의 변형인 전(田)ㆍ신(申)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車)로 바꾸고 자기 이름을 무일(無一)로, 아들 임(琳)은 신을(神乙)로 고쳤다.
그 후 무일(無一)의 33세손 승색(承穡)이 신라 애장왕(哀莊王)때 좌상(左相)으로 국정(國政)을 다스리다가 809년(헌강왕1) 병부령(兵部令)으로 있던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헌강왕(憲康王)이 됨으로 전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헌강왕을 암살할려다가 실패하자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아래 묵방동에 은신하고 조모님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柳)로 고치고 이름을 색(穡), 아들은 숙(叔)으로 고쳤다. 색(穡)의 6세손 해(海)가 왕 건(王 建)이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할 때 사재(私財)를 털어 차(車) 1천 량을 제작, 군량과 함께 보급하여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올랐다.
태조 왕건은 <이차위달(以車爲達 : 차로써 목적을 달성)>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차달(車達)의 두 아들 증 장남 효전(孝全)은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를 잇게 하여 종적(宗籍)을 연안(延安)으로 하게 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에게는 류씨(柳氏)를 계승하게 하고 본관(本貫)을 유주(儒州)로 하였으나 지명의 변천으로 유주가 문화(文化)로 개칭됨에 따라 문화(文化)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진 문화류씨의 인맥(人脈)으로 소감(少監) 총(寵 : 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當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언침(彦沉)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문화류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언침(彦沉)의 후손에는 판관(判官) 안택(安澤 : 상호군 식의 아들)의 아들 관(寬)이 유명했다. 1371년(공민왕20)문과에 급제한 그는 고려조에서 20년간 벼슬하였고,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1393년(태조2) 병조의랑(兵曹議郞)으로 출사하여 1429년(세종9) 81세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4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35년간을 입사하여 도합 55년동안 주요관직을 지낸 현신(賢臣)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그는 우의정(右議政)에 오를 때까지도 동대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는 초가(草家)에 살며 청백(淸白)함으로 역사를 수(繡)놓았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태종(太宗)이 낮에 가서 울타리를 하면 못하게 할 것이므로 선공감(繕工監)을 시켜 밤에 몰래 가서 울타리를 둘러놓게 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집이 너무 허술하여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우산을 펴들고 부인과 더불어 비를 가리고 있으면서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 하니, 이에 부인은 “우산 없는 집에는 다른 마련이 다 돼있답니다” 하여, 그가 웃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그의 집에는 꽃나무 두어 포기가 있을 뿐이고 집에 있을 때는 맨 발에 짚신을 끌고 손님을 맞이했으며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김을 매기도 하였다.
손님이 와서 술을 대접할 때는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는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 금사발 하나로서 술을 치게 했고 술안주는 기껏 소금에 저린 콩자반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전곡이 하나도 없이 친지들이 추렴해서 장사를 지냈을 정도였으며 집이 너무 초라하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우산에 비하면 이것도 과람하다”고 했다고 한다. 관(寬)의 아들 중 계문(季聞)은 세종(世宗)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개성부유수(開城部留守)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태종이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명으로 안 지(安 止)․ 최흥효(崔興孝)등과 함께「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썼다.
그의 아들 권(睠)은 참판(參判)을 지내고,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中宗)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부자정승(父子政丞)으로 유명한 상운(尙運)은 좌랑(佐郞) 성오의 아들로 숙종 때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좌ㆍ우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英祖)때 <소론사대신(小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이르렀다. 한편 판예부사(判禮部事) 공권(公權)의 둘째 아들 택(澤)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경(儆)이 충렬왕(忠烈王)때 찬성사(贊成事)와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ㆍ희종(熙宗)ㆍ강종(康宗)ㆍ고종(高宗) 등 4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문하(門下)에서 안 향(安 珦)ㆍ이 혼(李 混) 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출처: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