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유래=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은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원손(遠孫)으로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선(善)이 고려 문종조(文宗朝)에서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다. 그 후 자손(子孫)들이 본향지(本鄕地)인 인동현(仁同縣)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始祖)의 증손 국신(國伸)이 고려 때 봉정대부(奉正大夫)로 내사령(內史令)을 거쳐 직사관(直史錧:역사를 편수하는 관청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玄孫) 위(偉)가 통의대부(通議大夫)로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고려 말기에 덕령부윤(德寧府尹)을 역임했던 안세(安世 : 군기 감사 위의 현손)는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개성 두문동(開城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하였으며 그의 아들로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냈던 중양(仲陽)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의 벼슬을 내려 회유하던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생활(隱居生活)로 일생을 마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인동 장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組)의 고제(高弟)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잠(潛)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식음을 전폐하며 스승의 억울함을 상소한 후 향리(鄕里)로 돌아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워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에 책록되었던 만(晩)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文)․무(武)를 겸비한 뛰어난 지략으로 북변방어와 신흥(新興)하는 청국세력(淸國勢力)에 대한정치와 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증산현령(甑山縣令)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던 돈(暾)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개천군수(介川郡守)로서 호병(胡兵)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생(儒生)으로 창의(倡義)하여 군위(軍威)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한쪽 팔을 잘렸으나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한 사진(士珍)과 성주(星主) 등지에서 의병(義兵)으로 활약했던 봉한(鳳翰),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전사한 홍한(鴻翰) 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덕령부윤 안세(安世)의 후손으로서 퇴계학파(退溪學派)의 거두(巨頭)였던 현광(顯光)은 당세에 문명(文名)을 떨쳤던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인(門人)이자 조카 사위이다. 1595년(선조 2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나이 42세에 보은현감(報恩縣監)이 되었는데 약 21일간 관직에 있다가 사임하고 물러난 후 형조좌랑(刑曹左郞)․ 순천군수(順天郡守)․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헌․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독서와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언제나 포의(布衣)로 조정에 나가 왕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전국을 돌며 격문(檄文)을 돌려 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 : 서울 강동구 송파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터)에서 청(淸)나라 태종(太宗)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현광은 세상을 등지고 동해안의 입암산(入嵒山)에 들어가 정수(靜修)로 만년을 보냈다. 특히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이라고 논했던 그는 율곡(栗谷)의 이기설(理氣設)을 찬동했으며, 경위설(經緯設 : 이기일본설이라고도 함)을 주장하여 독창적인 학설(學說)을 세웠다.
그 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훈공을 세웠던 붕익(鵬翼)과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태소(泰紹), 숙종 때 우승지(右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청명직절(淸名直節)>의 명신으로 이름났던 응일(應一), 병자호란 때 인동(仁同)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했던 경우(慶遇), 현종(顯宗) 때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던 석룡(錫龍) 등이 유명했다.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哲宗) 때 등과(登科)하였던 태수(泰秀)가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비분단식(悲憤斷食) 끝에 순국하여 이름을 떨쳤다.
근대에 와서는 대한매일신보주필(大韓每日新報主筆)을 지낸 지연(志淵)과 국문학자(國文學者) 지영(志暎), 민주당을 조직하여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던 운석(雲石) 면(勉)이 대표적이고, 조국광복운동을 주도했고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지냈던 창랑(滄浪) 택상(澤相)과 한국일보(韓國日報)와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하고 국제올림픽조직위원과 남북조절위원회부위원장을 역임했던 백상(百想) 기영(基榮) 등이 인동 장씨(仁同張氏)를 더욱 빛냈다.
출처: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