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유래]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 (景王:제24대왕, 재위기간:기원전 544~ 520)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우(琴牢)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응(琴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초(高麗初)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琴氏)의 본관(本貫)은 봉화(奉花)를 비롯하여 계양(桂陽 : 김포의 별호)ㆍ안동(安東)ㆍ평해(平海)ㆍ봉산(鳳山)ㆍ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금씨(奉花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 : 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봉화(奉花)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금씨(奉花琴氏)는 봉화(奉花)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이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세조(一世祖) 의(儀)는 1184년(명종 14)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使)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1215년(고종 2) 금자광록대부금(金紫光祿大夫 : 문관의 종2품 관계)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책록되어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으며 1230년(고종 17) 향년(享年) 78세로 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묘지(墓地)가 장릉(章陵 : 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奉花郡 祥雲面 下訥里)에 설단(設檀)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우(崔 王禹)에게 죽음로 항거했던 휘(暉)는 의(儀)의 아들로 노지정(盧之正)ㆍ김희제(金熙?)등과 함께 억울하게 순위당한 희종(熙宗 : 제21대왕, 재위기간 : 1294~1211)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며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규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은진현감(恩津縣監) 회(淮:시조의 12세손)의 세째 아들 휘(徽)가 세조(世祖) 때 문무(文武) 양과(兩科)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담양군사(潭陽郡事) 극해(克諧)의 아들 유(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전라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그는 4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稱頌)을 받았는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영동(永東)의 신관에서 그의 사람됨을 칭송하는 시(詩),〈금상(琴相) 맑은 풍(風)세 일대(一代)의 현인(賢人)일세. 푸른 냇가 누각(樓閣)에서 거문고가 울리도다〉를 지었다. 선조(宣祖) 때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물두하던 난수(蘭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공(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성주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재(梓)의 아들 응협(應夾)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첨정(僉正) 원수(元壽)의 아들 보(輔)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서화가(書畵家)로 명성을 떨쳤으며 응석(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적선정(積善亭)〉이라는 편액을 써 주어 그의 덕망을 칭송하였다. 제천현감(堤川縣監)을 지낸 응훈(應壎)은 창원부사(昌原府使) 업, 여주목사(驪州牧使) 개(愷), 예안현감(禮安縣監) 상현(尙絃) 등과 함께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전통(傳統)을 지닌 봉화금씨(奉花琴氏)를 더욱 빛냈다.
[주요집성촌] 경상북도 봉화군경상북도 문경시경상북도 영양군
출처: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