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유래 = 남궁씨(南宮氏)는 고대 중국(中國)의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와 함께 동래(東來)한 남궁 수(南宮 修)의 후예로 전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남궁씨의 시조(始祖)는 고려 성종(成宗) 때 대장군(大將軍)에 오른 남궁원청(南宮元淸)이다. 그는 본래 감물아현(甘勿阿縣) 출신으로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귀국후 991년(성종10)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白頭山)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을 전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로 감물아백(甘勿阿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함열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후손 득희(得禧)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득희(得禧)의아들 신(信)이 고려조에서 호군(護軍)으로 충혜왕(忠惠王)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 적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올랐고 판도판서(版圖判書) 경(璟)의 아들 민(敏)은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내고 충목왕(忠穆王)때는 정치관(整治官)이 되어 왕(王)에게 학문(學問)을 강론했다. 조선조에 와서는 소윤(少尹) 우(祐)의 아들 계(啓)가 태종(太宗) 때 좌명원종공신(左命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대호군(大護軍)에 올랐으며 세종조(世宗朝)에 정주목사(定州牧使)와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거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윤(漢城府尹)ㆍ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를 지내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특히 왕(王)의 시강관(侍講官)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찬(璨)은 군수(郡守) 치(致)의 손자(孫子)로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人物)이다. 1489년(성종20) 문과(文科)에 급제한 그는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며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 때 화(禍)를 입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제현(諸賢)들의 억울함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용안(龍安)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당시 그의 문명(文名)이 중국(中國)에까지 알려지자 명(明)나라에서는 그의 묘소에 세워질 인문석(人文石:묘소에 세운 문관 형태의 석물)을 하사했는데 배로 옮기는 도중 태풍을 만나 바닷속에 잠겨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신통하게도 인무석이 서해안 바닷가에 떠올라 전북(全北) 익산시(益山市) 성당면(聖堂面) 갈산리(葛山里)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찬은 슬하에 필(弼 : 현감), 익(翼 : 현령), 숙(淑 : 지중추부사), 열(說 : 습독)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家脈)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1540년(중종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침(忱)은 익(翼)의 아들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명종조(明宗朝)에는 암행어사(暗行御史)로 경상도(慶尙道)를 안무했다.
한편 판윤(判尹) 숙(淑)의 맏아들 제(悌)는 선조(宣祖) 때 등과하여 평강현령(平康縣令)ㆍ진잠현감(鎭岑縣監)ㆍ의령어사(宜寧御史)등의 외직을 거치면서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 왕(王)으로부터 <거관근검부역평균(居官勤儉賦役平均)>이라는 여덟 글자를 하사(下賜)받았다. 그 외 광해군(光海君)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인조조(仁祖朝)에 서흥군수(瑞興郡守)를 역임한 경과 곡산군수(谷山郡守) 집(鏶)이 유명했고 관찰사(觀察使) 율(嵂)의 아들 옥(鈺)은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곱 차례나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동안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했다.
명경(明經)과 효행(孝行)으로 팔도에 이름났던 제는 여러 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한 후 일생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1671년(현종1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垕)는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는 비(碑)를 자신의 고향인 삼전도(三田渡 : 지금의 서울 강동구 송파동)에 세우자 그 곳이 더럽다고 하여 105결(百五結 : 약 30만 평)이나 되는 토지를 버리고 문서까지 불태운 후 깊은 산골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하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천재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벽(壁)과 무궁화 역사사건으로 유명한 억(檍)이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자료제공 :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