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유래]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高麗)때 신호위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 되었다. 그 후 양준(陽俊)의 아들 소(劭)가 고려 고종(高宗)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 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開豊郡 中面 德水里 軍壯山) 아래에 있는 그의 묘(墓)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여니산(如尼山)을 주산(主山)으로, 동쪽에 군자암(君子岩), 북쪽에 성인암(聖人岩), 서쪽에 대장암(大將岩), 남쪽에 성현암(聖賢岩)을 거느린 야자형(也字形)의 명당(名堂)으로 소문이 난 명묘(名墓)이다. 소(劭)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인 윤온(允蒕)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 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받들고 누대로 세거(世居)해 온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명현(名賢)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천선(千善 : 윤온의 아들)이 뛰어났고, 도사(都事) 윤번(允蕃)의 증손(曾孫) 변(邊 :수사재시사 공진의 아들)이 유명했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했던 변(邊)은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특히 변은 “내 평생 남을 속인 일이 없다.” 고 떳떳하게 자부했다. 그가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서 매양 인재를 뽑는데 판서(判書)를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받지 않았으나 판서는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퇴청하였다.
마침 그 날 판서가 그 고기로써 맛있는 성찬을 차려 변(邊)을 대접하자 그는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얼얼의 고기입니까” 하며 힐책하자 판서가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고 한다.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재상이었다. 변(邊)의 손자 거(琚)는 1480년(선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과천(果川) 등지에서 탐관오리를 다스렸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속칭되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인범(仁範)의 후대에서는 그의 현손(玄孫)인 홍산현감(鴻山縣監) 의석(宜碩)의 증손 율곡(栗谷) 이(珥)가 빼어났다.
1536년(중종 31) 아버지인 찰방(察訪) 원수(元秀)와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 기묘명현 신명화의 딸,일명 신사임당)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 신씨가 꿈을 꾸었는데, 흑룡(黑龍)이 바다로부터 솟아 올라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었기 때문에 어릴 대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다. 율곡(栗谷)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하며, 겨우 세살 때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하니, “붉은 가죽 주머니 속에 부서진 구슬을 넣었도다” 라고 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주야로 울부짖던 율곡(栗谷)은 어느 날 우연히 불가(佛家)의 글을 보고 그 사생설(死生設)에 깊이 느낀 바 있었고, 또 그 학문의 간편청정(簡便淸淨)함을 기뻐하여 세상 일을 버릴 생각을 하였다. 열아홉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여러 벗들에게 글을 보내어 고별하고, 이내 절(寺)에 살면서 계(戒 : 5계와 250계가 있는데 이를 지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와 정(定 : 마음에 동요됨이 없고 안정된 것)을 굳게 하여 침식까지도 잊어 버렸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불교가 이치에 가까운 듯 하면서 진(眞)을 혼란하게 한 곳이 있음을 엿보고, 드디어 그 학문을 모두 버리고 유학(儒學)에 전심했다. 율곡은 22세 때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이듬해 처가에 갔다오는 길에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을 찾아 갔다와서 그 해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천도책(天道策)>이란 유명한 논문으로 장원하고 초시(初試)․ 복시(覆試)에 아울러 아홉차례나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웠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초임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副校理)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에 편찬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