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유래]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 제26대, 재위기간 :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이 전해온다. 예향(禮香)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腹中)에 병(病)이 생겨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病)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丈夫)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龍)의 아들 옥결(玉玦)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子孫萬代) 번영(繁榮)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容貌)가 준수(俊秀)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李學士)가 이상히 여겨 왕(王)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下賜) 하였다고 한다. 계룡(繼龍)은 자라서 진평왕(眞平王)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창녕(昌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계룡(繼龍)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겸(謙)은 신라 말(新羅末)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혼인(婚姻)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창녕조씨가첩(昌寧曺氏家牒)」에 의하면 겸(謙)의 손자(孫子)인 연우(延祐)로부터 10세손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배출하여 가문(家門)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傳)한다. 고려말에 와서 크게 이름을 떨친 민수(敏修)는 공민왕(恭愍王) 때 순주부사(順州府使)로 여러 장군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라 우왕(禑王) 초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왜구를 물리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했다가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창왕(昌王)을 세우는데 공(功)을 세워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이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관찰사를 지낸 항(沆)의 아들 석문(錫文)이 유명하였는데,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이조(吏曹)․ 형조(刑曹)․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지냈고, 세조(世祖) 즉위에 공(功)을 세워 좌익삼등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는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난(亂)의 평정에 공(功)을 세우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이듬해 왕명(王命)으로 노사신(盧思愼)과 함께「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을 거쳐,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호조참판(戶曹參判) 위(偉)는 현감(縣監) 계문(繼門)의 아들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우고 성종(成宗) 때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을 거쳐 승문원정자(丞文院正字)가 되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성종대(成宗代)에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지도자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碩學) 식(植)은 판교(判校)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대 유학계(儒學界) 대학자(大學者)로 추앙되었으며,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여러번 벼슬에 천거(薦擧)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여 문하(門下)에서 김효원(金孝元)․ 김우옹(金宇顒)․ 정인홍(鄭仁弘) 등 저명한 학자(學者)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한편 중종(中宗)때 무신(武臣)으로 이름난 윤손(潤孫)은 대사헌(大司憲) 숙기(淑沂)의 아들이다. 수차에 걸친 야인(野人) 정벌에 공(功)을 세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인 계상(繼商)과 계은(繼殷) 형제는 영흥판관을 지낸 구서(九敍)의 아들로, 계상은 공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계은(繼殷)은 목사(牧師)를 거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계상(繼商)의 아들 광원(光遠)은 명종(明宗)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曾孫) 문수(文秀)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능하여 명필(名筆)로 손꼽혔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영조(英祖) 때 교리(敎理)․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낸 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오른 명교(命敎)가 글씨에 뛰어나「능가사사적비(愣伽寺事蹟碑)」를 비롯한 많은 비문(碑文)을 남겼다.
윤형(允亨)도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은 풀․ 돌․ 대나무를 잘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종(中宗) 때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치우(致虞)와 그의 증손(曾孫) 광익(光益)․ 호익(好益)이 이름났다. 호익(好益)은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군민(軍民)을 규합하여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下賜) 받았고, 정유재란 때는 다시 강동(江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한 후 안주(安州)․ 성천(成川)․ 정주(定州) 등지의 목사(牧師)를 역임했다.연산군(燕山君)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숙기(叔沂)는 주역(周易)에 정통했다.
중종(中宗) 때의 반정공신(反正功臣) 계형(繼衡)과 인조(仁祖)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우인(友人), 이조판서(吏曹判書) 석우(錫雨) 등이 뛰어났으며, 근대(近代)에 와서는 만식(晩植)이 민족독립운동가(民族獨立運動家)로 조선일보사장(朝鮮日報社長)을 역임하여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여 명망높은 창녕조씨(昌寧曺氏) 가문(家門)을 빛냈다.
출처: 한국족보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