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동포와 첫 만남

2016-06-03     박용만

▲ 박용만 행정사
【중국동포신문=박용만 행정사】 한국과 중국의 국교수립은 1992년 이뤄졌다. 내가 중국동포와 첫 만남은 1995년 쯤 되는 것 같다. 김포국제공항 입국과에서 공항경찰로 근무할 때였다. 당시 한국은 중국, 소련, 동구권국가와 막 국교수립해 교류가 시작될 때로서 한국에 도착한 중국동포는 한국인의 초청자가 없으면 공항경찰이 1:1로 여관에 잠을 재우면서 까지 초청자 올 때까지 감시를 해야 했다.

그때도 동북3성 중국동포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중국동포들은 우리들이 나누어준 신청서를 기재한 후, 일정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고, 공항경찰은 기재된 신청서를 들고, 마중 나온 대합실 출영객을 향해 신청서에 쓰인 이름을 불러 초청자를 찾았다. 공항경찰은 초청인의 주소지와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중국동포를 내보내주곤 했다.

지금처럼 녹음이 우거진 5월 어느 날 저녁, 중국에서 도착한 비행기에서 칙칙하고, 어두운색의 인민복을 입은 중국동포들이 시끌벅적하게 무리를 지어 입국장으로 들어오는데 중국동포 중 노란색투피스를 입은 한 여인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여인은 한국어를 훌륭하게 하고, 적당한 키에 미모도 갖춘 여행사 안내원으로 중국인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지금 젊은이들처럼 예쁜 배낭을 메고, 동포들을 지휘(?)하고 있어 우리 공항경찰이 다가가 신청서를 주고, 기재방법, 질서유지를 위한 부탁을 하는 등 서로 소통을 잘해 신속하게 100명 이상의 중국동포를 신속히 가족 또는 초청인에게 인계, 일찍 끝낸 일이 있었다. 그 여행사 안내원은 매우 세련된 매너를 가진 인상적인 첫 중국인 이였다.

당시 중국동포들은 이민가방(가방허리에 지퍼 달림. 지퍼를 열면 커지는 가방)에 우황청심환, 편자환 등 중국의 한약재가 잔뜩 들은 가방을 1인 2~3개를 든 4~50대 동포 분들이 많았는데 여객운송법상 1인 20킬로그램 휴대량이었으나, 1개 가방무개 40킬로, 2~3개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당시는 세관에서는 동포들이라 동포애로 세관검사를 묵인해줬다. 중국동포의 반입이유는 한국의 친.인척들이 많아 하나씩 나눠 주려고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 문제가 생겼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관검사를 묵인한 결과 동 한약재가 남대문 지하도, 지방의 재래시장, 등에서 팔리고 있는 것이다. 편자환은 간에 좋다고 한국 사람들은 많이 샀다. 그리고, 중국동포들은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우황청심환을 애용하는 한국인이 많이 있었다. 중국재 한약재가 검역절차도 없이 시중에 팔려나가고 있는 현상이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중국동포들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약재를 반입하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를 세관에서 통제하기 시작했다. 초기 중국동포들의 모습이었다.

중국과 한국 수교이전에 한.중간 진한 우호를 나타낸 사건이 있었다. 바로 “중국민항기 불시착” 사건이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 날, 산수유, 수국, 튤립등 신록의 계절에 어린이와 부모들이 천진하게 뛰어노는 평화로운 날에 갑자기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중공군비행기 출현“ TV등에서 실시간 자막을 보고 온 국민은 적지 않게 놀랬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민항기였고, 테러범이 민항기를 하이젝킹해 대만으로 갈 것을 요구했으나, 기체 고장으로 춘천 비행장에 불시착했고, 중국인 승객 105여명이 타고 있었다. 민항기 협상을 위해 중국 외교관 센토, 한국 외교부 공노명 국장이 송환협상을 벌리면서, 센토의 협상자세가 한국인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05명의 중국인 탑승객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관광시켜 주면서 적극 홍보하고, 백화점에서 전자제품과 음식 등을 풍성하게 먹이고, 선물도 한 보따리씩 안겨준 것이 한·중간에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계기가 됐다. 냉전시대에 이던 세계정세에 비하면 6.25 이후 중국 사람들과 국가 간 처음 대면하는 사건으로 10년 후 한·중수교 발판이 된 것이다. 이후 중국동포들의 내왕이 점차 확대 일로되어 단순 친척방문에서 발전하여 취업, 유학생교류, 경제교류확대를 통해 한, 중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한. 중간 무역규모도 40%를 점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중국동포의 경제적인 면 또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에 중국동포들이 처음 정착해 벌집 같은 주택에서 열악하게 생활하면서 소규모 장사를 하는 사람이 늘어, 짜장면, 전골, 꼬치집 등 영세 가게 운영을 했고, 이후 짜장면 재벌 이라고 할 정도로 장사규모가 커진 중국동포들이 많아졌다.

이제 대림동 일대에서는 초, 중등학교 학생들 40% 이상이 동포의 자녀들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동포들은 웨딩홀, 주유소, 건물인수 하는 등 대자본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동포 권익보호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배출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95년 초기 중국동포들이 열악한 환경 하에서 출발해 이와 같이 발전한 것은 괄목할 성장이고, 중국동포들은 너무 거칠고, 살인사건 등 강력사건의 주역으로 한국인들의 우려를 자아내자 대림동 일대 에서는 스스로 ‘자율방범대’를 조직해 중국동포의 범죄를 예방하는 활동, 한국경찰의 포용, 순화정책으로 이제는 범죄발생수가 대폭 줄어들어 한. 중간 친화, 우호적인 관계에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양국의 우호관계는 지금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박용만 행정사 (GS합동행정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