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조상찾기 캠페인> 한국인의족보 경주정씨 상(上) 편

2016-10-07     이재경 기자

▲ 경주정씨 족보
【중국동포신문】관향의연혁 =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 (國號)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國名)을 동일시 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 제도가 실시되면서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시원(始源)을 이룬다.

가문의유래 = 경주정씨(慶州鄭氏)는 진한국(辰韓國) 사로(斯蘆)의 6촌(村) 중 취산진지촌장(嘴山診支村長) 지백호(智伯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동경지(東京誌)」에 의하면, 지백호(智伯虎)는 기원전 117년(한무제 원수 6) 경주 화산(慶州花山)에 강림(降臨)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던 사로(斯盧)의 여섯 고을 중 취산진지촌을 다스리면서 신라건국(新羅建國)에 모체(母體)를 이루었고,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그의 현손대(玄孫代)에 와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改稱)되면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문화(文和)로 시호를 받았고, 656년(태종무열왕 3)에 감문왕에 추봉되었다.

그 후 경주정씨는 시조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크게 4파로 갈라졌고, 지손(支孫) 계통에서는 30여 본(本)으로 본적(本籍)되어 우리나라 모든 정씨(鄭氏)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첫째 문헌공파에서는 시조의 42세손 진후(診厚 : 검교첨의평리 극중의 맏아들)가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호부상서(戶部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위(偉)의 아들 현영(玄英)은 호부상서와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거쳐 벽상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그 후 문헌(文獻)으로 시호(諡號)를 받았으므로 문헌공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정헌대부로 이부상서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종철(宗哲)의 둘째 아들 인조(仁祚)는 공양왕 때 길주목사(吉州牧使)와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한 맹장(孟將)으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장군 아지(阿只)를 격퇴시켜 더욱 무명을 떨쳤다. 조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홍덕(弘德 : 사간원 정언 인량의 아들)은 단종(端宗)이 손위하고 죽음을 당하자 팔순노모(八旬老母)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隱居)하며 단(壇)을 만들고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哭)을 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염(廉)의 아들 지년(知年)은 1438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을 거치면서 관직을 역임하고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단종(端宗)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文宗)의 수탁고명신(受託顧命臣)으로서 단종이 손위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종숙(從叔)인 홍덕(弘德)과 함께 남원 교룡산에 은거하였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효항(孝恒)은 성종(成宗) 때 서거정(徐居正) 등과 더불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및「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撰修)했다. 한편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했던 효상(孝常 : 지년의 둘째 아들, 효항의 아우)은 예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 이(南 怡)와 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공(功)을 세워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책록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통덕랑(通德郞) 인필(仁弼)의 아들 지운(之雲)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차례 전공을 세워 함흥판관(咸興判官)에 제수되고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던 승복(承復)의 아들 사준(思竣)과 사횡(思?)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워 헌종(憲宗) 때 창의비(倡義碑)와 대첩비(大捷碑)가 세워져서 가문에 절맥(節脈)을 세웠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 윤근(允謹)의 아들 창문(昌文)은 부친이 임진왜란에 진주성(晉州城)에서 순절하자 원한을 마음 속에 새겨 정유재란 때 10촌 형(兄) 원길(元吉)과 함께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로잡았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의 계략에 휘말려 순절하였다.

양경공파(良景公派)의 인맥(人脈)으로는 공민왕(恭愍王) 때 일기도주(一岐島主)의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휘(暉)의 아들 희계(熙啓)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훈공을 세워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그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진력했다.

자료제공 :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