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그는 세종이 상왕(上王 : 태종)께 잔을 올릴 때 영돈령(領敦寧)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태종이 가죽 한 장을 하사하면서 “내가 변변치 못한 물건을 경들에게 주는 뜻은 가죽과 같이 장수(長壽)하라는 뜻이다”했으며, 술을 마시면서 옥잔(玉잔)에다 술을 부어주며 일체동심(一體同 心)의 뜻을 전했다. 정현이 죽었을 때 세종은 흰 도포에 검은 모자와 검은 띠를 매고 백관을 거느리고 금천교(禁川橋) 장막에 나와 곡을 했다고 한다. 현감(縣監) 함(浛 : 찬성사 만수의 중손)의 아들 자미(自湄)는 세조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그러던중 사육신(死六臣)이 화를 입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산수(山水)를 방랑하였고 성삼문(成三問)의 딸을 몰래 데려다 숨겨서 길러 자부(子婦)로 삼았으며 황해도 수양산 신광사(黃海道首陽山神光寺)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음에 이르러 유언하기를 “내가 신하로서 임금에게 그리고 조상에게 아무런 보람있는 일도 못하고 죽지 못해 살았으니 선영곁에 뭍지도 말고, 또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사육신(死六臣)으로 유명한 성원(誠原)은 세종(世宗)때 문과에 급제 하고 이듬해 저작랑(著作郞)이 되어「의방유취(醫方類聚)」편찬에 참여했으며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절재 김종서(金宗瑞)등을 살해하고 단종(端宗)에게 거짓으로 보고한 후 이 거사를 성공시킨 공신들을 표창토록 하는데, 수양의 협박에 못이겨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녹훈(錄勳)하는 교서(敎書)를 쓰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통곡했다고 하며,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마(洗馬) 사공(思恭 : 만수의 증손)의 아들 순(洵)은 연산군(燕山君) 때 영의정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에 올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왕명으로 서거정(徐居正)ㆍ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연주시격(聯珠詩格)」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일찍이 성종조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으면서 임금이 미인도(美人圖)를 내놓고 시를 지어 올리라는 어명을 내렸을 때
임금이 스스로 여색을 멀리하여 (君王自是踈聲色)그림을 펴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 (展畵猶應寄一顰)
고 하자 성종은 칭찬하고 병풍을 만들게 하여 계색의 본을 삼았다고 한다. 인종(仁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관(灌)은 태조 때의 우의정 양(亮)의 6세손이며 장령(掌令) 정수(廷秀)의 아들로서 인종(仁宗)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으나 소윤(小尹)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정순붕(鄭順朋)의 탄핵을 받아 서천(舒川)으로 유배도중 과천(果川)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세도에 아부하여 윤 임(尹 任) 일파를 제거시키는데 성공한 정순붕은 관(灌)의 가족들을 적몰해 자신의 종으로 삼았는데 갑이(甲伊)라는 관의 여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를 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사도시정(司導寺正) 엄(渰)의 아들 광찬(光纘)은 관에게 양자로 들어갔는데 관이 처음 귀향가게 되었을 때 장차 화(禍)가 심하리라는 것을 알고 양자를 취소하는 문서를 만들어 주어서 노비가 되거나 살육당하는 화를 면하기도 했다. 마침 그가 양자로 들어온 후에 관의 소실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이것을 핑계삼으면 법(法)으로는 인정되었다. 그러나 관이 죽음을 당하고 그에 광찬이 연루되어 죽게 되자 집안 사람이 이 문서를 가지고 관가에 가서 죽음을 면해 줄 것을 빌려 했으나 그는 “한번 부자간으로 이름을 붙였으니 좋으나 나쁘나 달리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서 죽음에 임하여 조용히 편지를 써서 그를 낳은 어머니와 집안 사람에게 주어 작별하고 스스로 만사(輓詞)를 두 편 지었는데 내용이 어찌나 비절(悲切)하였던지 듣는 사람이 모두 슬프게 여겼다고 한다.
광찬의 아내 신씨(申氏)는 모든 재산과 노비를 몰수당하고 홀로 형장에 들어가 부자(父子)의 유골을 주워 모아다가 함께 선산 밑에 장사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묘(墓)에 올라갔다. 그 외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진봉된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양(亮 : 밀직사 계조의 아들)과 선조 때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올라 문양군(文陽君) 에 봉해졌던 희림(希霖)이 유명했고, 현감 예선(禮善)의 아들 전(琠)이 영의정에 올라 가문(家門)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중종 때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낸 옥(沃)은 문무(文武) 겸비로 이름을 떨쳤으며, 현종(顯宗) 때의 실학자(實學者)인 형원(馨遠)은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고한 기품의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그 밖의 인물로는 정조 때 북학파(北學派)에 속한 실학자로 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 등과 더불어 <한문신파사가(漢文新派四家)> 로 불리워진 득공(得恭 : 진사 관의 아들)>이 회고시(懷古詩)와 기행문에 능하여 이주원(李주元)으로부터 <동국(東國)의 문봉(文鳳)>이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기상(基常)은 헌종(憲宗) 때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올라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서다가 서흥(瑞興)에서 사형(死刑)당한 상렬(相洌)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결성에 참여했던 동열(東說)이 1935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김규식(金奎植)ㆍ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문화류씨를 더욱 빛냈다.
자료제공: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