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유래]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始祖)로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大學士)로, 984년(성종 3) 고려(高麗)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조(高麗朝)의 인물(人物)로는 1107년(예종 2)에 문숙공 윤 관(尹 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용맹을 떨쳤던 명장(名將) 연총(延寵)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이른 한경(漢卿), 그리고 광정(光庭)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朝鮮)에 와서도 가문을 빛낸 많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인유의 14세손이며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아들인 윤겸(允謙)은 선조(宣祖)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찰사(觀察使)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노서(老西)의 영수(領袖)가 되어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뒤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첨화삼학사(丙子斥和三學士)의 한사람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어 윤 집(尹 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뛰어났던 윤겸(尹謙)의 손자(孫子) 도일(道一)은 숙종(肅宗) 때 도승지(都承旨)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에 올라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또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숙종(肅宗)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두인(斗寅)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의 아들 태주(太周)가 현종(顯宗)의 부마(駙馬)로서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자 원(瑗)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특히 영조에게 학문(學問)과 덕(德)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였고 옳다고 믿는 일은 직언(直言)을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원(瑗)의 아들 재순(載純)도 학문으로 당대에 뛰어났고 양관 대제학(兩館 大提學)을 역임하여 부자(父子) 대제학(大提學)으로 이름이 났다.
근대 인물(近代人物)로는 조선말(朝鮮末) 개화(開化)의 선각자(先覺者)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소장 정치인들에게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유대치(劉大致)․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교우(交友)하며 개국(開國)을 주장하였고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룬 경석(慶錫)과, 3․1운동(運動)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이었던 그의 아들 세창(世昌)이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여 가문(家門)을 더욱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들이다.
이외에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옥사(獄死)한 동진(東辰)과, 한국 의학(醫學)의 개척자요 사회사업에 진력하여 많은 공을 세운 긍선(兢善), 그리고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문단에 나와 초창기 시단(詩壇)의 선구자였던 공초 상순(相淳)등이 명문(名門) 해주오씨(海州吳氏)를 더욱 빛냈다.
[주요집성촌]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용전리,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대치리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매곡리 황해도 벽성군 월록면 상림리
자료제공 :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