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豊山)은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景德王)때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923년(고려태조 6)에 이곳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한 공(功)으로 순주(順州)로 승격하였다. 후에 후백제 견훤(甄萱)에게 함락되어 다시 하지현이 되었으며 풍산(豊山)으로 고쳐 현종(顯宗) 때 안동(安東)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다시 안동에 속하여 지금의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에 이르고 있다.
◇ 가문의 유래
풍산류씨(豊山柳氏)는 고려(高麗) 때 수주(樹州 : 경기도 부평의 옛 지명) 호장(戶長)을 지낸 류 절(柳 節)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문화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전한다. 일찍이 영남(嶺南)의 젖줄기인 낙동강변(洛東江邊)에 자리잡아 명문의 위치를 지켜온 풍산류씨는 일세조 절(節)의 7세손 종혜(從惠)가 조선 태조(太祖)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조부(祖父) 난옥(蘭玉 : 창평현령을 지냄)과 부친 보(葆 : 고려 말 검교예빈경을 지냄)가 지어놓고 적선(積善)을 베풀었던 관가정(觀稼亭)이 있는 하회(河回)마을에서 풍산류씨의 가맥(家脈)을 계승했다.
가통(家統)을 지켜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진보훈도(眞寶訓導) 공지(公智)의 손자 종개(宗介)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태백산(太白山)을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봉화(烽火)의 소천(小川) 전피현(箭皮峴)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간성군수(杆城郡守) 공작(公爵)의 아들 중영(仲郢)은 명종조(明宗朝)의 명신(命臣)으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가 되어 토호(土豪)들의 횡포를 엄중히 다스렸으며 육영(育英) 기금을 마련하여 교학 진흥에 이바지한 공(功)이 컸다. 중영(仲郢)의 맏아들 운룡(雲龍)은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초기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와 제자 백가(諸子百家)에 정통했다.
그 후 인동현감(仁同縣監)을 거쳐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토적(討賊)을 소탕했고 특히 풍화정치(風化政治)에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어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우 성룡(成龍)은 선조조(宣祖朝)의 명상(名相)으로 문장(文章)과 학행이 뛰어났으며, 역사의 최대 난국인 임진왜란을 맞아 고비에 처해있는 위국(爲國)을 수습하는데 중임을 맡아 불멸의 훈공을 남겼다. 1542년(중종37)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慶北 義城郡 點谷面 沙村里) 외가(外家)에서 태어난 서애 성룡(成龍)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어려서부터 벼슬하는 아버지 중영(仲郢)의 임지(任地)를 따라 여러 지방 을 옮겨 다니면서도 글공부에 열중했다.
그 후 21세 때 형 운룡과 함께 도산(陶山)의 퇴계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近思錄)을 전수 받았고 성현(聖賢)의 도를 배워 학문(學問)에 뛰어났다. 일찍이 스승인 퇴계가 그를 평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셨다” 라고 하였고, 선조(宣祖)는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이항복(李恒福)은 “이 분은 어떤 한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 이름 지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회은집(晦隱集)」에는 <이원익(李元翼)은 가히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가희 속일 수 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2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성룡은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하여 풍파 많은 벼슬길에 첫 걸음을 딛게 되어 영상(領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항상 가난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성룡(成龍)의 아들 중 진(袗)은 광해군(光海君) 때 유일(유逸)로 천거받아 세마(洗馬)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 봉화현감(奉化縣監)을 거쳐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초(初)는 광국호성원종공신(光國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한편 성룡(成龍)의 장손 원지(元之 : 여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과 역학(易學)에 밝은 학자로「상수소설(象數小說)」을 지어 12패도(卦圖)의 근원을 밝혀 명성을 떨쳤으며 운룡의 증손 세명(世鳴 : 원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지평(持平) 등을 거치고 일찍이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로 서천군수(舒川郡守)의 부정을 탄핵하여 파면케 하였다.
그 외 정조(正祖) 때 경산현령(慶山縣令)으로 치적(治績)을 울렸던 규와 순조조(純祖朝)에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태좌(台佐)가 유명했고, 도정(都正) 심춘(尋春)의 아들 후조(厚祚)는 대원군(大院君)의 인재등용에 발탁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ㆍ공조(工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고종(高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1867년(고종 4)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러 치사한 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시(詩) 한 수를 짓고 자결했던 도발(道發)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받았고 신영(臣榮)은 고종(高宗)이 독살(毒殺)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고 음독자결 하므로써 문벌과 충절(忠節)의 가문인 풍산류씨의 가통(家統)을 살렸다.
자료제공 :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