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주지번이 평양(平壤)에 이르던 저녁에 기도회고(箕都懷古) 오율(五律) 백운(百韻)을 내어서 빈막(賓幕)에 보내고 다음날 새벽까지 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이정귀가 몸이 달아 사람들을 모아 그 대책을 물으니 모두가 밤이 짧아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니 운을 나누어 지어서 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정귀는 “사람마다 명의(命意)가 같지 않으니 한 사람에게 위촉함만 같지 못하다. 이는 차천로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천로는 “술 한 동이와 큰 병풍 하나에다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를 얻지 못한다면 될 수 없다.”고 하자 이정귀는 곧 갖추어 주었다.
천로(天輅)가 큰 병풍을 대청(大廳) 위에 두르고 술 수십 사발을 마신 뒤에 병풍 안에 들어가 앉고 한석봉은 병풍 밖에서 화전지(花箋紙)를 펴놓고 붓과 먹을 갖추어 대기하였다. 천로는 병풍 안에서 철서진(鐵書鎭 : 책장 또는 종이 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시상(詩想)을 고르다가 높은 소리로 “한석봉아 나의 일귀(逸句) 준어(駿語)를 받아 쓸지어다.” 하며 글귀를 부르자 한석봉의 속필로서도 받아 쓰기가 바빴다. 밤이 깊지 않아서 벌써 오언백율(五言百律)이 이루어지자 천로는 크게 한 소리를 외치고 취도(酔倒)하였다.
특히 천로는 뛰어난 문장력과 활달한 성품을 갖추어 당대 제일의 문사(文士)로서 한석봉의 글씨, 최 입(崔 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가사(歌辭)와 글씨에 뛰어났다. 천로의 아우 운로(雲輅)는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의현감(全義縣監)과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교리(敎理)를 지냈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문장(文章)이 탁월하여 형 천로(天輅)와 더불어 당대의 명사(名士)였던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웠다. 천로(天輅)의 아들 전곤(轉坤 : 군수를 지냄)과 서곤(瑞坤)도 모두 시서화(詩書畵)로 이름났으며 서곤의 5세손 좌일(佐一)이 명문장가(名文章家)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좌일(佐一)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노고산(老姑山) 밑에서 그를 잉태할 때 꿈에 당(唐)나라 하지장(賀知章 : 당나라 산음 사람으로 문사와 초예에 뛰어났음)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호(號)를 사명자(四名子)라 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따를 사람이 없었다. 장성하면서 경사(經史)와 시화(詩畵)에 정통하여 당시의 문장가로 손꼽았던 홍양호(洪良浩)ㆍ윤행임(尹行恁)ㆍ윤사국(尹師國)ㆍ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비워 좌일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이 우수하나 벼슬이 높지 못해 항상 세상을 불평하며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울분을 술과 시(詩)로 달랬다.
어떤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자 그는 시로서 답하기를 <내 살아서는 취향백이되고, 죽어서는 수문랑이 되리라.> 라고 했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최 북(崔 北)ㆍ천수경(千壽慶)ㆍ장 혼(張 混)ㆍ왕 태(王 太) 등과 더불어 성(城) 서쪽에다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松石園)>이라 이름하고 시문(時文)으로 여생을 보내며,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노라.> 고 외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아우 예량(禮亮)과 함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충량(忠亮)이 화의(和議)가 성립됨을 통탄하여 청태종(淸太宗)을 죽이고 원수를 갚겠다고 최효일(崔孝一)을 중국에 보내고 아우 예랑을 심양(瀋陽)에 보내는 계획을 하다가 거사 전에 탄로나서 남별궁(南別宮) 밖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아우 예량(禮良)은 형이 죽자 청나라 태종을 암살하겠다고 만주땅을 누볐던 사명척화(事明斥和)의 골수분자였는데 전답을 팔고 가산을 털어 큰 배를 만들어 심양에 갔다가 정보를 입수한 청태종의 계략에 말려 거사전에 참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차씨와 최씨의 가족 수십명이 의주(義州)에 연행되어 참형을 당했고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예량의 종제(從弟) 원철(元轍)도 연좌되어 잡혀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 형관(刑官)들은 이 음모가 조선을 괴롭혔던 청국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였기에 가급적 죄인들을 두둔하고 사건을 축소하려고 노력하였기에 청인(淸人) 형관들이 둘러앉은 재판정에 차원철(車元轍)이 들어서자 조선의 형관이 “아니, 원씨(元氏)가 무슨 죄로 잡혀들었는가?” 하며 차씨라는 성(姓)을 빼고 두자 성명인 원 철(元 轍)로 조작해서 석방시킬 내심이었다.
이에 원철은 “나의 성은 원씨가 아니라 엄연한 차씨이다. 나라를 위해 두 번도 아닌 단 한 번 죽는데 성을 속여가며 살고 싶지 않다.” 하고는 참형을 당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단체인 <포우단(砲牛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도선(道善)과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하여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앙양하고 애국지사의 독립투쟁을 배후에서 후원했던 석보(錫甫)가 유명했으며 희식(喜植)은 화성군 쌍봉산(華城郡雙峰山) 만세시위의 총지휘자로 일본 경찰을 살해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9년 2개월간이나 복역했고 이석(利錫)은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후 임시정부 비서장(秘書長)을 역임하여 충절(忠節)의 전통가문인 연안차씨를 더욱 빛냈다.
자료제공: 한국족보편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