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신문 / 동포신문=김성호 기자】한민족이라면 이밥을 떠나서 살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이밥맛은 참 맛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우수한 상품은 첫 번째가 입쌀이고 그 다음 순이 화장품, 의류, 가전제품 등일 것이다.
어느 날 김포 5일장에 들렸다가 우연히 김포가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벼 재배를 시작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포일산지역에서는 기원전 2,4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논농사를 지었다. 기원전 1,000년부터 벼 재배를 시작한 일본보다 1400년이나 앞섰다.
자랑스러운 것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한반도의 벼 재배기술을 가지고 만주지역에서 쌀농사를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다. 만주 지방의 첫 논농사는 고구려의 발상지인 길림성 통화현에서 시작되었다. 1846년 조선 평안북도 초안군의 80여 호의 농가들이 통화지구의 훈강 유역에 이주하여 목재를 벌채하면서 벼를 재배한 것이 벼 재배의 효시였다. 그 후에는 밀산. 단동. 연변 등지에 퍼지면서 점차 만주 전역까지 벼 재배에 성공했다.
와중에 만보산사건이 일어났다. 동포들이 논을 관개하기 위하여 장춘에서 송화강물을 끌어올리는 수로공사를 하던 중 인근의 중국인 농민들이 "수로공사 때문에 콩밭이 망가지고 땅에 물이 찬다"며 항의하다가 유혈사건이 발생하여 그 당시 항간의 화제가 되였다. 비록 이 사건은 그 후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 구실로 이용당했지만 동포들의 만주에서의 벼 재배가 그만큼 애로가 많았음을 알려준다.
이주동포들은 농사를 짓기 위하여 뿔뿔이 흩어져 외로이 살면서 한반도의 몇 배나 되는 만주땅 허허벌판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씨를 뿌렸다. 봄이면 동북삼성 나아가서는 네이멍구지역의 방방곳곳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모내기하는 동포들의 정겨운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중국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통화현조선족만족자치향인 대천원향의 입쌀이 베이징 중난하이의 "공미"가 되여 당시 중국 국무원총리인 저우언라이의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현재는 흑룡강성의 오상 쌀이 유명하다. 오상도 중국동포들의 주요 주거지역이다.
20년 전만 해도 입쌀은 동포들의 주식이자화폐였다. 생산물자, 생활용품 지어는 과일이나 고기 등 못 바꾸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동포들의 입쌀이 인기가 있었고 고가의 귀중한 상품이었다.
만주지방에서의 동포 벼 재배 역사는 중국동포들의 이주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던 동포들의 후예들이 지금 다시 한국에 들어와 3D업종도 가리지 않고 노동하면서 새로운 산업기술을 습득하고 있다. 머지않아 이 동포들이 또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한국의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조상들의 뒤를 이어 한민족의 지혜를 한층 더 빛낼 것이다.
김성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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