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신문=오피니언】공항 출입국검사 안쪽으로 들어가시는 엄마의 왜소한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 찍으며 돌아선 지가 어제 같은데 어느새 엄마의 얼굴에 네 번이나 새로운 년륜을 새겨 놓으셨다. 세월은 무정하다고 늘 말하시던 옛사람 말의 참 뜻을 엄마의 한국행에서 다시 한 번 떠올려보게 된다.
5년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는 고령동포 비자 대신 굳이 3개월 단기복수비자를 신청한 것은 년로한 엄마가 고국에 대한 구경보다는 돈에라도 집착할가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고생스레 살아오신 내 엄마를 잠간 유람이라도 하고 돌아오라고 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엄마의 왜소한 뒷모습을 보니 자신의 불효가 느껴지면서 마음은 무겁기만 했었다.
허나 엄마에게 드린다는 그 “효성”마저도 내게는 또 하나의 불효를 만들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유람만 하고 금방 돌아오라고 천당부 만당부했었건만 엄마는 나 몰래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빨리 돌아오라고 야단하면 힘들게 살아가는 딸에게 부담주기 싫다면서 조금만 더 일하고 오겠다고 한지도 벌써 4년째다. 머리에 백발이 내렸어도 마흔을 넘어선 자식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 결국 오늘날 불법체류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수많은 날들을 숨소리도 바로 쉬지 못하면서 지내오게 하였다.
나도 그간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엄마와 한 달에 한두번 정도 전화 통화를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청도에서 근무하는 회사가 부도나 취업이 어려워져 결국 나도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래서 4년 만에 엄마를 보게 된 것이다. 키 작은 엄마가 싱크대 앞에 받침대를 놓고 힘겹게 그릇 씻는 모습, 중국에서 십년 전에 했던 치아가 덜렁 떨어져나가 호물데기 할머니가 돼버린 엄마, 또한 무릎 관절이 아파서 한쪽다리를 비틀면서 걷는 모습을 본 나는 엄마를 붙들고 오열하고 말았다. “엄마, 미안해! 어떡해? 내가엄마를 이 모진 세상에 내던져 버렸어요. 빨리 가요 중국에! 중국에 가서 편하게 노후를 보내세요!”하며 애타게 설복했다. 장장 4년 만에 만난우리 모녀는 상봉의 희열에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튿날 어머니가 그래도 내가 여기 한국에 있는 게 편하다면서 청도에 있을 때에 주위에 중국 사람들뿐이고 조선족이라 해도 고향사람들이 아니라서 정을 나눌 수가 없으니 이렇게 돈이라도 벌면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엄마를 중국에 들어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말친구 한사람도 없는 청도에서 무료하게 보내다가 한국 유람을 나왔다가 지금까지 불법체류하고 있는 엄마다. 이제 중국에 돌아가면 언제 다시 한국 땅을 밟아보랴. 차라리 딸이 있는 이 한국에 있으면 매일 통화도 할 수 있고 휴일이면 엄마 보러 갈 수도 있다.
내가 한국에 온지도 일 년 다 되여가던 날, 엄마가 눈살을 찌푸리고 티비를 보시길래 눈이 잘 안보이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눈앞이 뿌연게 텔레비 화면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셨다. 나는 가슴이 덜컹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고혈압약, 당뇨병약, 진통제 등 매일마다 약 한줌씩 드시는 엄마가 혹시 당뇨병 종합증에 걸리지 않았을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일하러 가야 한다며 딱 잡아떼는 엄마를 설복이 아닌 애원을 하여서야 장안 사거리에 있는 새서울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할 수 있었다. 검사결과는 당장 수술이 필요한 백내장이란다. 다행이도 오른쪽 한쪽 눈만 수술하면 된다고 했다. 엄마의 친동생이 갖고 있는 모의건강 의료보험증으로 수술을 했기에 수술값은 35만원밖에 들지 않았다. 수술 후 하루 만에 텔레비죤을 보면서 화면이 빤한 게 참 좋다고 환하게 웃는 엄마한테, “울 엄마 딸 덕 보았네.”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눈이 좋아졌을 거라고 내가 방심한 사이에 하마터면 또 큰일 날 뻔했다. 수술한 이튿날. 의사선생님이 삼일 후, 일주일 후, 보름 후, 한 달 후, 3개월 후에 검진 받으라고 일러줬지만 갈 때마다 진료비 내야 된다면서 집에서 눈약만 넣으면 된다고 고집 피우는 엄마를 더 말리지 않고 눈약만 챙겨드렸다. 십여 일이 지난 후 눈약이 떨어져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엄마를 당장 모셔오라고 했다. 아직 실을 뽑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엄마는 큰 변을 모면하게 됐다. 수술 후 엄마는 노인요양원 일을 그만두시고 한 달간 휴식했다. 한 달 집에서 놀고만 있으니 속이 갑갑하시다면 서부근에 있는 노인복지병원에 출근 중이시다.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로 하여 자신의 본명까지도 속이면서 출근하는 엄마. 그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모라는 이름을 새롭게 가슴에 새겨본다.
부모가 열 번 생각할 때 자식은 한번 생각해도 효자라고 하지만 정말 그 효란 자식에게 있을가를. 불편한 몸으로도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서 한 점 남은 힘마저 깡그리 태워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 부모가 무엇인지를 마흔이 지난 오늘 다시 배우고 있다.
장충실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중국동포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조선족대모임 : http://cafe.daum.net/yanji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