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신라(新羅)에서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제51대왕, 재위기간 : 887~897)때 견훤(甄 萱)이 이 곳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40년(고려 태조 23) 태조(太祖)가 신 검(神 劍)을 토멸(討滅)하고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성종(成宗) 때 해양현(海陽縣)으로 불리우다가 1259년(고종46) 기주(冀州 : 일명 기양주)라 고쳤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恭愍王)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는 현(縣)으로 강등되어 광산(光山)이라 칭하다가 연산군(燕山君)때 다시 주(州)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관할의 광주군(光州 郡)이 되었다가 1935년 광주(光州)가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가문의 유래]
광산노씨(光山盧氏)는 도시조(都始 祖) 노수(盧穗)의 9형제 중 맏아들 노해(盧垓)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아버지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신라(新羅)에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 었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광산백(光山伯) 해(垓)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때 정승(政丞)을 지내고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진 만(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호군(大護軍) 서(恕)를 일세조로 계대(繼代)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대호군(大護軍) 서(恕)의 증손 숭(嵩)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우왕(禑王) 때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는 왕에게 극간(極諫)을 서슴치 않다가 미움을 받기도 했으나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창업에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태종(太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대제학(大提學) 유간(有幹)의 손자 준공(俊恭)은 고려 말 단상제(短喪制)가 성행하던 때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3년상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정려(旌閭)를 하사(下賜) 받았다.
중종(中宗)과 선조대(宣祖代)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던 수신(守愼)은 1515년(중종10)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장원급제 하고 청환요직(淸宦要職)을 역임했으나 간신의 무리들이 그 명성을 시기하여 귀양 보내졌다. 특히 그는 적소(謫所)에서도 학문(學問)에 힘썼으며 항상 임금과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으로 읊은 시(詩)가 많다. 그가 진도(珍島)로 유배갔을 때의 일이다.
진도군수 홍인록(洪仁祿)이 집권자의 비위를 맞추어 백단(百端)으로 곤욕을 주면서 "죄인이 어찌 옥식(玉食 : 쌀밥)을 먹을 수 있나" 하고 산간에 있는 고을에서 일부러 좁쌀을 바꾸어다가 주었으며, 하룻밤에는 달이 밝은데, 수신이 아이종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군수가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연락(宴樂)을 할 수 있는가" 하고 피리를 분 아이 종을 가두었다. 선조(宣祖) 때 다시 등용되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언관(言官)들이 유배지에서 악독하게 굴었던 홍인록을 공격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그가 극력 구해(求解)하여 마침내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임명받도록 하였다.
19년 동안의 귀양살이 속에서도 퇴계 이 황(李 滉), 하서 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하여 휴정(休靜), 선수(善修) 등과의 깊은 교제로 불교학문(佛敎學問)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별제(別提)와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던 흠(欽)이 시(詩)와 글씨에도 능하여 삼가(三嘉)의 고암서원(古岩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정 구(鄭 逑)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했던 극홍(克弘)은 임진왜란 때 자제(子弟)와 일가 장정을 이끌고 곽재우(郭再祐)휘하에서 참모(參謀)로 활약하여 창녕(昌寧)의 화왕산성(化旺山城) 방어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웠다.
생원(生員) 대성(大成)의 아들 극복(克復)은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학행(學行)으로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했고, 정묘호란 때는 고성(固城)에서 의병을 모아 군량(軍糧)조달에 앞장섰으며, 수신(守愼)의 증손 준명(峻命)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王)을 호종하여 홍원목사(洪原牧使)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던 계원(啓元)은 학행(學行)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에만 진력, 후진양성에 힘썼으며「오행설(五行說)」과「정성서의(定性書義)」를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주요집성촌]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구 우치동경상남도 창녕군함경남도 갑산군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동창동전라남도 함평군
출처:한국족보편찬회 대표 김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