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유래] 우리나라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은 황제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중국에서 고대조선(古代朝鮮) 망명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여 살며 왕조명(王祖明)으로 변성명하였고 그 후손 왕 몽(王 蒙)이 정치적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전(田)ㆍ신(申) 등으로 개성(改姓)하였다가 후에 차무일(車無一)로 변성명하여 차씨(車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신라(新羅) 초기에 승상(承相)을 지냈던 차무일(車無一)의 아들 8형제중 일곱째 차신을(車神乙 : 본명 王林)이 차씨(車氏)의 성(姓)을 계승하여 후손대에서 25명의 승상(承相)이 배출되어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기틀을 다졌다.
차무일(車無一)의 32세손 차건신(車建申)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 제40대왕, 재위기간 : 800~809)의 서삼촌(庶三寸)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이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황해도 유주(黃海道儒州 : 현 신천군 문화면)로 달아나 숨어 살며 조모(祖母 : 조부는 승상, 儉夫)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씨(柳氏)로 변성하고 자기 이름을 류 환(柳 桓)으로 아들 공숙(恭叔)은 류 숙(柳 淑)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6세손 류차달(柳車達)의 아들 대(代)에서 류씨(柳氏)와 차씨(車氏)로 갈라졌다.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 본명은 柳 海)은 고려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이 남정(南征)하여 후백제(後百濟)를 칠때였다. 부하로서 그가 수레 천 대를 만들고 창고에 있던 양곡을 실어 군량미로 보급하여 줌으로서 왕 건이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왕 건이 그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며 벽상2등공신(壁上二等功臣)으로 대승(大丞)에 봉작하고 이름도 차달(車達)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대승공 차달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의 홍렬은 잊을 수 없다.> 하며 상조(上祖)의 본성(本姓)인 차씨(車氏)의 성(姓)을 잇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하면서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은 소윤(少尹)의 벼슬과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 류씨(柳氏)의 성을 계전하도록 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직사관(直史?) 거수(擧首)의 아들 약송(若松)이 고려 신종(神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병마사(兵馬使) 덕위(德威)의 아들 척(倜)이 고종(高宗)때 어사대부(御使大夫)와 참지정사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원부(原? : 지방어사 종로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목은(牧隱) 이 색(李 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당대에 명유(名儒)로 일컫어졌으며 고려 말에 정국이 혼란해지자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隱居)하였다. 「운암실기(雲巖實記)」에 의하면 원부가 은거하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찾아와 그의 혁명 계략을 상의하였다. 이에 원부는 부당하다고 극구 만류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정권을 잡은 다음 조 준(趙 浚) 등을 차례로 보내어 벼슬과 녹권(錄券)을 하사(下賜)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수 차례 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거절했다가 정도전(鄭道傳)ㆍ하륜(河崙) 등이 보낸 병력(兵力)에 의하여 추살(椎殺)되고 내외 당족 80여 명이 함께 참살당했다. 한편 원부(原?)의 조카 운혁(云革)은 경성(鏡城)에 살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정휴명(鄭休明)ㆍ박성장(朴成章)ㆍ조 두(曺 ?) 등과 더불어 이시애 납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적에게 잡혀 단천(端川)에서 살해당했다.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고「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으며, 교수(敎授) 광운(廣運)의 아들 식(軾)은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역임했고 경사(經史)와 학문이 뛰어났다. (하편 계속)
출처: 한국족보편찬회